분당과 일산신도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정부가 사업을 급하게 추진한 결과 신도시 발표 이후 7개월 만에 시범단지가 분양됐고 2년만인 1991년엔 첫 입주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 보상 문제 등으로 잡음도 적지 않았다. 현재 10만 가구, 4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거주하는 분당은 일제시대 갑부인 박흥식이 도시로 개발하려고 했고 1974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젠가 긴요하게 쓰일 땅’이라고 예언할 만큼 좋은 땅이었다. 신도시로 탈바꿈하기 전에는 70%가 농경지, 23%가 임야였다. 분당에는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상복합부터 서민을 위한 각종 임대아파트까지 다양한 종류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또 오피스텔과 백화점 등 상업시설들도 건설됐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 서현역 주변에는 삼성과 한신, 우성, 현대 등 민간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민간 건설사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토지공사에서 땅을 매입해 단지를 조성했다. 대부분 30층 건물로 고층 아파트시대를 주도했다.
분당 북쪽은 중심 상권이 형성돼 지금도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단지들이 집중돼 있다. 중산층을 겨냥한 것이라 중대형이 많고 평면도 1980년대 주택공사가 공급한 것에 비해 세련됐다. 조망권을 고려한 단지 구성과 고급 편의시설을 곳곳에 설치된 것도 눈에 띈다. 정자동도 알짜 지역에 속한다. 이곳 역시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와 주상복합 단지들이 많다. 넓은 녹지 공간도 장점에 속한다. 카페거리와 율동공원 등 명소가 조성돼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아파트 값이 비싼 편이다. 특히 몇몇 주상복합들은 서울의 상류층까지 분당으로 유인하는 단지로 꼽힌다. 수영장과 골프연습장 등 입주민의 수준에 맞는 각종 시설을 설치해 고급 아파트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개발한 신도시인 만큼 영구임대와 국민임대 단지들도 많다. 정자역 인근에는 서민들을 위해 건립된 아파트들도 꽤 많다.
일산은 신도시로 지정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곳이다. 북한과 가깝고 군사시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산은 대부분이 절대농지였다. 처음 신도시 발표가 났을 때 입주민들을 전쟁의 방패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일산신도시는 약 7만 가구, 27만 명이 살고 있다. 조성 당시 분당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신도시였던 셈이다. 택지를 개발할 때 가급적 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으로, 호수공원과 정발산공원 등은 일산을 쾌적한 신도시로 만든 대표적인 녹지공간이다. 아파트 특성은 분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민간 건설사들에 의해 건립됐기 때문이다. 분당과 일산신도시 조성으로 1990년 중반 집값은 안정됐다. 수도권 주택 보급률도 1997년에는 80%를 넘어섰다. 그러나 기반시설이 건설되기 전에 아파트 입주가 시작돼 초기 입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또 주택 위주로 도시를 조성해 베드타운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집값 안정을 신도시 개발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지만 분당의 경우 ‘버블세븐’ 중 하나로 부동산시장 불안을 부추기는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실제 분당과 일산 아파트 가격은 분양가보다 2배 이상 올랐다. 민간 아파트시대를 열었다는 성과가 있었지만 짧은 기간 안에 많은 아파트를 짓다 보니 설계와 디자인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단점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