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이야기

[스크랩]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우리 민족을 해방시켰다

fiat 2005. 12. 14. 21:03

무식돌이 진중권이 그의 반미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 자주 쓰는 말이 "카쓰라-태프트 조약"이다. 무식한 진중권은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의 반미주의 만능논리로 이용한다. 무엇이 진중권의 논리이던가? 백년 전의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항구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마치 이 말은 19세기 말의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썼으니, 21세기의 한국도 쇄국 정책을 쓴다는 주장과 똑같은 말이다. 만일 미국의 한국학에서 한국의 외교 정책은 대원권 시절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련데, 진중권의 미국학이 지금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언제까지 "카쓰라-태프트 조약"을 단골 메뉴로 반미 논리를 주장할 것인가? 미국의 한국학은 19세기의 한국과 21세기의 한국은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중권 류의 한국 좌파의 미국학에서는 19세기의 미국과 21세기의 미국이 똑같다고 우긴다.

그런데, 미국 대학교에서 미국 역사를 공부해본 적이 있는 이들은 "카쓰라-태프트 조약"이 유명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에 놀란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도 우리 민족이 다른 나라들과 맺었던 조약들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어렵다. 아마 1905년 을사보호조약 외에는 별로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을사보호조약을 실수로 여기는 이상으로 미국 역사에서 1905년 "카쓰라-태프트 조약"을 미국의 과오로 여기고 비중 있게 다르며 역사의 교훈을 삼고 있다.

미국은 큰 나라요, 무수히 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던 나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조선이라는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조약에 대해서는 그토록 큰 비중을 두고 당시의 실책을 비평하는 역사가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미국에서 유일 무이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무식돌이 진중권이 주장하듯 미국의 전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에서 전무 후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무식돌이 진중권은 2005년 미국과 1905년 미국이 동일한 초강대국인 것처럼 발언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905년의 미국은 유럽이 약소국으로 여겼던 나라요, 미국이 유럽의 유행을 부지런히 수입하던 시대였디. 당시 유럽 문명을 휩쓸던 것이 제국주의였으며, 그 제국주의가 백 년 전 미국에도 수입되었다. 그래서 그 때 스페인으로부터 필립핀 식민지를 인수하는 문제가 여론을 들끊게 한 관심사였다. 찬성론자들은 필립핀에 문명을 선사하는 것은 선진국의 사멍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교도 건국정신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1905년 한때 제국주의가 이겼지만, 1919년에 민족자결주의가 이겼으며, 그 후로는 민족자결주의가 미국 국제정치의 주춧돌이 되었다.

자, 무엇이 "카쓰라-태프트 조약"이었던가? 필립핀으로서는 일본이나 중국에 점령당하는 것보다는 스페인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나았으며, 스페인 식민지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미국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일본이 필립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둔 것이 카쓰라-태프트 밀약이었는데, 또 하나의 항목이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 지배권이 러일 전쟁 승자에게 있다는 것을 미국이 일본에게 인정하여 준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의 본질은 묵인이었지 나누어 먹기가 아니었다. 러시아가 한반도를 병탄하기 위해 쳐들어 왔었을 때 일본이 막아낸 전승국 권리를 국제사회가 인정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인수한 필립핀 식민지도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만, 미국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져보는 식민지였으며, 그곳이 아시아였기에 일본의 영토 확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서로 묵인하자는 약속을 받아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 식민지 인수는 미국과 스페인간에 체결된 조약의 문제요, 일본과 체결한 조약의 본질은 나누어 먹기가 아니라, 묵인이었다.

진중권같은 무식돌이들은 카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삐앗긴처럼 떠들어대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러일전쟁이 본래 러시아가 한반도를 병탄하려는 욕심을 내었기 때문에 터진 전쟁이었다. 오늘날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와 달리 그 당시는 제국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였으며, 러시아가 일본에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러 나누어먹기하자고 밀약 제의한 것을 일본이 거부하였기 때문에 화근이 되었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일진회가 고종 황제께 을사보호조약 청원을 하여 체결되었던 것이다.

1904년 8월에 결성된 일진회(一進會)는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면서 을사보호조약의 조기체결을 촉구했다. 한일합방을 청원하던 1909년에는 그 회원수가 1백만에 육박한 일진회(一進會)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송병준(宋秉畯)이 1904년(고종 41) 8월 20일에 조직한 친일정치단체였다. 이들은 백만 명 서명을 하여 1909년 순종에게 한일합방안 청원을 하였다.

1905년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인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미국이 나서서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 또한 없는 것이다"라는 메모를 태프프 육군대장에게 주어 태프트 육군 대장이 일본 가쓰라 외상과 밀약을 맺는 것을 재가하였다. 그러나 비공개 조약이 훗날 국제사회 망신거리가 되었던 것이며, 미국은 역사적 교훈을 삼고저 그 망신거리를 역사 교과서에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우리 민족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준 열사가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자기 배를 갈랐어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당시 조선은 국제사회에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였다.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것보다 수십 배 더 힘든 것이 1910년 체결된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미 세계지도에서 한반도는 일본 영토로 표시되어 있었으며 한국사가 국제사회에 알려진 일이 없었다. 현대적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학자들은 일제 시대에 비로서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제 시대 이전에 우리 민족이 배웠던 역사는 중국 역사가 전부였으며, 우리 민족 역사가 국제사회에 알려진 일이 없었다.

무식돌이들 중에는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헛소리를 하는 작자들도 있다. 러시아 심부름으로 만주국에서 빨치산 활동을 좀 한 것 가지고 조선독립운동이었다고 사기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 독립군이 소련군이나 중공군 신분이 아니라,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독립군이 독립운동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 결국, 우리 민족 독립은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에 의한 독립운동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사가 국제사회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 민족이 본래 독립국이었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퍽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바로 카쓰라-태프트 조약 문서가 해 주었다. 아마 진중권류의 무식돌이들은 일본이 미국에 패전하면 자동적으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것인 줄로 착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미국이 승전국이라도 일본 영토를 손톱만큼이라도 빼앗은 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 문서상 한반도가 일본 영토라면 일본의 패전 후에도 우리 민족은 일본 식민지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구인이 개발권을 가지고 유럽 식민지와 다른 형태의 합방이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일본은 한국이 일본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의 일부라는 논리를 폈으며, 창씨 개명 역시 조선은 일본에 흡수된 민족이라는 증거로서 강요되었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궤변을 꿰뚫어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맥아더 원수였다. 본래, 카쓰라-태프트 조약은 일본이 필립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둔 것이었다. 그리고, 태프트 미국 육군대장이 카쓰라 일본 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외교적 효력이 양국 사이에는 분명한 문서였다. 그런데, 일본이 필립핀을 침략하였을 때 일본 스스로 카쓰라-태프트 조약을 어긴 것이 맥아더 장군 눈에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이 아무리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라고 주장해도 을사보호조약 문서가 효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구나, 카쓰라-태프트 조약 문서가 1905년 이전에 조선이 독립국이었음을 명확하게 입증해 주는 물증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 문서는 강탈에 의한 것이었음을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증언하는 이였기에 일본은 항복 문서 사인과 더불어 한일합방 문서도 무효화하고 한반도를 우리 민족에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승만 박사의 역할도 컸다. 국론의 대세가 한일합방이었던 때에 그는 외롭게 한입합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다가 투옥되었으며,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하여 일생을 한일합방 문서의 논리를 무너뜨리는데 바쳤다. 그리고, 한일합방 문서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단서는 맥아더 장군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의 애국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존경하며 인연을 맺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때 여기 한일합방 문서 논리와 35년간 싸워온 이승만 박사가 있었다. 그리고, 카쓰라-태프트 밀약 40년 만에 또 한 명의 미군 수뇌부 맥아더 장군이 조선은 1905년 이전에 독립국이었으며, 을사보호조약 문서는 사기 문서였다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포츠담 회담은 2차 대전과 종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을 일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그리고 더 나아가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지원하여줄 것을 국제사회에서 분명히 약속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국제 사회에서 우리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한일합방 문서 논리를 한방에 박살낸 맥아더 장군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 민족을 구한 영웅이기 전에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에 주권과 국토를 되찾아 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 동상 수호 사이트가 업데이트되었어요
http://myhome.naver.com/bookclub/kous/

주한미군의 우정 칼럼 모음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library/korea-usa.htm

한국전쟁 동영상
http://myhome.naver.com/bookclub/movie/korean-war.htm

일본 논객들의 정한론 논리를 막아내지 못한 조선인 논객들의 대세가 한일합방론이었던 시대에 외롭게 한일합방 반대 투쟁을 하던 청년 이승만의 옥중 시절 사진. 청년 이승만이 감옥에 있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는 감옥에 도서관을 만들어 주고 책을 보내 주었는데 이때 쌓은 지식과 견문이 훗날 그를 한일합방 문서 논리를 무너뜨리는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로 성장시켰다.

 

 

출처 :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글쓴이 : 역사학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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