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6월3일

[스크랩] 박동혁병장 어머니의 눈물의수기

fiat 2006. 6. 17. 18:52
서해교전 전사 의무병 박동혁 병장 어머니의 육필 수기 내아들아!누구를위해 목숨을받쳤니 아들아 잘 지내
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
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 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페기능 소생 기
술 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 에 대장은 망
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 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
이 있고 화상으 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
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 리가 100개가 더 있다
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 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
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갔다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 네 .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
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
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 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
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
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
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 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
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 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1일 중환자실
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 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
청난 상처를 뒤 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
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 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
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 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
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
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 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
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 국 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
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
원 내정자라고 한 서동만 교수는 서해교 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
다 가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
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 다. 국방부에
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나 왔
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 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 ‘왜 동혁이
는 오지 않냐?’고 미친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가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 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
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 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
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 는 너를 너무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반듯하 게 잘 자라준 아
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 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
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분들게,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서해교전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받다 같은해(2002) 9월20일숨진 고 박동혁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출처 : 자유토론방
글쓴이 : 타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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